2011년 8월 9일 화요일

[사도바울]-알랭바디우

<사도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1. 모든 가치들이 화폐’제국’의 가치로 환원되는 시대에 이 구조를 넘어서는 보편에 대한 사고를(구성을)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진리라는 것이 각 상황에서 인간의 동물적 반응으로 또는 아직 인간에게 도래 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는 이 시대에 보편으로의 진리를 찾는 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P.60 모든 것의 핵심은 주체의 분출은 우주나 자연의 법칙들에 대한 개인적인 순응이라는 수사적 구성물로서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평가는 진지해 보인다. ‘그리스인들’ 앞에서 실패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문제를, 그리스인들은 지혜, 즉 철학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한 것 들이 바울의 기획의 두 가지 역사적 관계항 이었다. 이러한 관계항들을 피할 수 있는 사유의 길을 찾아야 했다. –중략- 모든 진리는 그렇게 시작된다.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의 구성은 화폐로 환원되는 가치들의 허망함을 조목조목 비판하거나, 새로운 (제도로서의)가치를 제시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진리가 각 주체에게 주관적으로 분배되어 있는 현재에 그 주관을 대체하는 객관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편의 윤리를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의 사도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2절]  사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어떠한 증거도 없으며 어떠한 앎도 없는 상태이다. 기존의 어떤 증거나 논리로도 환원되지 않는 상태, 그러한 방식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이다.

이것은 마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사기꾼이거나, 대안이 없이 해체를 주장하는 무책임한 사람이란 비난을 내재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유대인의 율법의 문제를 넘어서고,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피해서 보편의 윤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너의 진리는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아래와 같이 대답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진리가 무엇(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옹이가 빠져나가서 구멍이 난 나무 판자가 있는데, 그 나무 판자를 보고 옹이가 있느냐라고 한다면 일단은 있다고 말한다…진리란 이런 거다.”

P.115 사람들이 표징을 요구할  때 그러한 표징들을 아낌없이 주는 자는 그것들을 요구하는 자들의 지배자가 된다.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질문할 때 대답할 수 있는 자는 그렇지 못한 주체의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예언이나 기적의 보증 없이, 논거나 증거도 없이 선언하는 자는 지배자의 논리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실제로 선언은 지배자가 자리 잡게 되는(요구의) 공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중략- 그리스도가 아들이라는 것은 사건의 선언이 선언하는 자를 자녀로 만드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2. 사도바울의 생애를 거의 모르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바디우는 사도바울의 ‘이야기’만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사도바울의 입을 빌린, 복화술로써 보편의 구성을 이야기 한다.) 전체적인 맥락은 기존의 시도(철학적, 경험적-증거와 논증이 가능한)로는 (현재의 대안? 으로서)보편의 윤리는 구성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인간을,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비판하는 한에서)현실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삶이 불가능 하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철학적 구조하에서 ‘새로운 진리 있음’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논리적 구조하에서 완벽한 객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리면 되겠다.

하지만 바디우가 개별성에서 보편으로 나아가는 것에서 나는 막혔다. 아마 이것은 보편에 대한 나의 태도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들과 동일해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아직 차이의 윤리와 개별성이 근거한 윤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데, 아니 오히려 기존의 가치(사고방식)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개별성에 대한 인정을 한다고 할 때, 드러나게 되는 기괴한 행위들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할지에 대한 입장이 정리가 안되어 있다.

아니면 바디우가 말하는 보편성이라는 것도 현재 윤리 수준(!)의 보편성이고 다만 구성방법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듯도 하다.(물론 내용은 현재와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 더 나아가 윤리의 존재 방식이 현재와 다를 수도 있다. 현재 윤리는 각종 율법과 지혜(철학)들로 지정(!)되어 있다. 새로운 율법과 지혜들을 추구(새로운 예수를 찾는 다든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해석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3. 다음으로 빼든 책이 슬라보예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이다. 아직 서문만 읽어 보았지만, 바디우와 같은 문제 설정에 다른 접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양자 모두 보편에 대한 탐색을 하는듯이 보이는데, 이는 전체주의라는 것에 대해서 병적으로 혐오하는 현재의 분위기가 역사적으로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었던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효과를 가진다기 보다는, 지금 모든 가치들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는 것이나 현재 이데올로기들의 폭력성을 민주주의라는 가치로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X파리도 새고, 허접한 가치도 하나의 의견 이라는 차원에서 존중받는 세상에서는 인간다움은 사라지고 야만이 판치게 된다. 이러한 야만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자유(구조를 거부하는 자유, 개인에게 온전하게 맡겨진 자유-바디우는 유물론적인 구조에 반대 하지만, "구조"에 의미를 둔다면)를 재 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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