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30일 월요일
누가 뭐라 해도 한가위만 같아라
<누가 뭐라 해도 한가위만 같아라>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진중한' 준세기 씨가 내 글이 올라간 다음날 바로 자신의 글을 써 올리는 것을 보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의 약조는 일주일씩 아니었나요. 게다가 나보고 어서 다음 글을 써서 올리라는 독촉까지 해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감은 19일이지만 남은 2주를 음주가무에 온전히 바치며 글을 쓰지 않았다. 데드라인이 생기자 액체 질소 세례를 맞은 듯 온몸이 얼어 사고가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사회적 틀에 잘 맞춰 사는 호모 사피엔스이지만 약간의 구속과 압박이 주어지면 바로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글 쓰자는 제안도, 데드라인도 내가 정했는데 이 모양이다. 마인드 컨트롤에 능한 알약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나왔던 알츠하이머 ALZ-112에 버금가는 Mctrl-113같은 신약 개발을 제약회사에 촉구해본다. <러브& 드럭스>의 제이미같은 영업사원을 쓴다면 비아그라 버금가는 세계적 알약이 될 것이다!
지구상에 너만큼 특별한 사람은, 아니 특별한 연휴는 없어.
이번 주엔 민족대명절 추석이 달력을 빨갛게 물들였다. 365일중 365일이 빨간색이나 다름없는 백수에게 휴일과 명절은 그저 그런 노는 날 중 하나이지만 준세기 씨같은 바람직한 양복차림의 직장인들에게는 조금 편한 날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다, 앞 문장 바로 취소. 명절엔 접미사로 '대란'이 붙는다. 명절대란. 난세, 난리, 난중 같은 단어에 들어가는 어지러울 '난亂'이다. 명절은 크리스마스, 석가탄신일, 광복절과 같은 빨간 날이 아니다. 귀경·귀성차량으로 내 차가 be동사+ing(현재진행형)인지 had p.p(과거완료)인지 알 수 없는 상태. 네비게이션에 도로는 다 빨갛게 칠해져있고 인터넷 게시판엔 명절 스트레스를 성토하는 글이 서버를 마비시킬 정도로 새까맣게 뒤덮인다. 이쯤 되면 명절은 굵은 글씨나 보라색으로 칠해 다른 빨간 날과 차별화를 둬야 할 듯싶다.
오션월드, 롯데월드? 우린 씨월드 간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시댁을 씨월드라 부른다. '시월드'보다 센 쌍시옷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씨발'같은 거친 분위기도 나는 단어. 중의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몸살을 앓는 도로 외에도 살아 숨쉬는 사람들은 더 큰 몸살을 앓는다. 오랜만에 모이다보니 그간 소식을 듣고자 내뱉는 질문공세에 학생들은 학교 점수가 시달려 울상 짓고, 노처녀· 노총각들은 결혼 못한 것이 인생의 대죄가 되는 양 가슴에 못이 박힌다. 취업준비생들은 고개가 익은 벼처럼 수그러들고, 내세울 것 없는 자식을 둔 부모들의 어깨 또한 마찬가지. 무엇보다 명절 관련 게시 글의 반을 차지하는 며느리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뼈를 깎는 고통과 출산의 고통에 비유할 정도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명절증후군은 연휴 몇 주 전부터 머릿속 가상 시나리오 때문에 일찍 시작된다. 점심 쯤 도착해, 전 부치기 시작했는데 정신차려보니 밤 9시였어요. 송편 빚고 토란국 끓이고 고기 삶고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에 일어나 제사지낸다. 겨우 명절이 끝나는가 싶더니 이때부터는 신경전이 시작된다. 며느리는 친정가고 싶은데 오후에 도착할 시누이를 보고 가라는 시어머니, 일가시댁친척집 순회를 다녀오자는 시댁, 결혼 전까지 자기 집이었기에 마냥 편해 더 있다 가자는 속없는 남편 등등. 이런 충돌은 누가 이겨도 모두가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현명한 대처는 없다. 돈 봉투 드리며 대신 먼저 친정 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주저앉아 엉엉 울며 시누이 기다릴 수도 없고. 기준이 다른 상식은 통할 수 없고 회사 상사와 마찬가지로 서열에 따라 갑을관계가 형성된다. 내 부모가 아닌 이상 마음껏 내 의사를 표현하기 불가능하다. 이렇게 명절을 치르고 어떻게 친정도 돌고 집에 들어오면 남편과 아내의 2차 대전이 시작된다. 결혼 못 해 욕먹은 노총각· 노처녀들도 삼삼오오 모여 친척 흉을 보고, 싫은 소리 들은 엄마아빠 또한 마찬가지다. 남편 흉, 며느리 흉, 시누이 흉, 시아버지 흉보느라 온 국민의 귀가 간질거린다. 정말 명절 대란이다.
<무방비도시>
우울한 명절을 지낸 나에게 조상님이 내려주신 선물
이런 명절에 대란을 겪지 않은 나는 집에서 철지난 신문을 뒤지고 영화를 봤다. 미혼자라 씨월드도 없고 부모님과 싸워 큰집도 못 갔다. 텅 빈 동네와 대조적으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TV가 거슬렸지만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조상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랄까.
올해 2월 서울 수유동에서 50대 여자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한 연기 질식사로 사망했다.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있었고 이불 밑에서 라이터가 발견되었다. 옆방에서 자던 딸은 도망쳐 나와 무사했다. 그리고 9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50대 남성이 베란다에서 추락해 즉사했다. 그는 폐암 투병 중 이었는데 잠시 친척 결혼식때문에 딸의 집에 왔다 봉변을 당했다. 담배 피우러 베란다에 나갔다 실수로 떨어진 것이라 경찰은 추측했다. 얼마 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사건을 파헤쳤는데 죽은 남녀의 딸이 모두 사건 현장에 있었다. 20대 A씨는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하고 친척집에 맡겨져 자랐는데 그 이후 갑자기 부모의 행방을 찾고 올해 나타났다. 화재로 인해 엄마가 먹고 죽은 수면제는 A씨가 병원에서 처방받은 것이고,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 아빠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베란다까지 갈 여력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A씨는 심지어 아빠의 보험금 수령자가 새 부인에게 되어있던 것을 자신에게 돌려놓았고 양 부모의 보험료 모두를 챙긴 뒤 지금 잠적중이다.
성공적인 복수 살인극을 기획한다면 이 사건이 제격일 듯싶다. 패륜아에 관한 기사를 찾다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픽션보다 훨씬 끝내준다. 어릴 때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한 복수라는 설정이 한국의 끓어오르는 한恨 정서와 가족애를 자극하며, 경찰도 뒤늦게 의심할 정도의 완벽 범죄. 법망을 피하고 거액의 돈을 챙겨 잠적한다는 사실에서 <무방비도시>의 손예진이 떠오른다. 완벽히 위조된 여권을 손에 들고 요트타고 유유히 떠나버려 종적을 감추는 엔딩. 지금 A씨도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전까지 잡히지 않을 것 같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긴장감있다. 여기에 더하여 <백야행>의 고수처럼 손예진의 그늘 역할을 한 내연남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하는 가정을 해 본다. 이 사건에 떠오른 영화들에 모두 손예진이 나오니 A씨 캐스팅은 손예진으로 해야겠다. 하하. 김칫국을 너무 많이 들이켰나.
명절을 없애고 싶지만…
추석 뒷담화로 시작해 이야기가 과하게 멀리 갔다. 명절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많이 오간다. 조상님께 감사하며 풍년을 기원했던 본 의미가 시간이 흘러 많이 달라졌지만 그나마 명절이 있기에 가족끼리 모일 수 있다. 몇 년 간 부모 한 번도 찾아뵙지 않는 바쁜 현대인이 많기 때문에 가족 화합의 의미에서라도 명절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서 부모님과 화해하고 나도 다음 설부터 집안일 도와야겠다. 혹은 그 전에 어느 집 며느리가 되어 명절을 맞게 된다면 더 좋겠지만.
+
글도 취해서 썼고 맞춤법도 취한 상태로 다듬었다. 지금도 취했다. 살짝 취하지 않으면 세 단락 이상 써지지 않는다. 이래서 내가 준세기 씨 앞에 '진지한'을 붙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오빠 컴퓨터에서 mp3로 옮겨온 Zebrahead의 노래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간만에 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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