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9일 목요일
<대책 없이 해피엔딩? 대책 없이 해피오프닝!>
이십대의 끝자락에 겨우 4년제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고해서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지지 않더라. 코스모스 졸업이라 진짜 졸업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여름은 작년과, 재작년과 같이 또 돌아온 방학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선풍기 바람을 쐬며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모니터 앞에 밥상을 차리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또 한 해의 여름이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굳지 않은 상태에서 보낸 방학, 아니 여름이 끝나갈 무렵 <대책 없이 해피엔딩>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씨네21>에서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이 번갈아가며 연재한 <나의 친구 그의 영화>를 묶어 내놓은 책이다. 영화 에세이 코너라고 되어있긴 하나, 매 회마다 사담을 줄줄이 늘어놓고 이 글을 올릴 곳이 영화 잡지라는 것을 갑자기 인식한 마냥 번뜩 영화에 관한 잡담 두어 개를 던지고 끝난 코너이다. 공통된 직업을 가진 김천 태생 죽마고우 남자 둘의 사담은 꽤나 재미있었다. 그래, 나도 이런 글쓰기를 해보자. 시시껄렁한 잡담과 비정기적 영화 리뷰만 포스팅 해왔기에 시간과 정성을 적절히 쏟을 규칙이 필요했다. 스스로 하기엔 훈육기제가 강력하지 않았기에 나의 김연수, 혹은 김중혁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머릿속에 온통 이런 생각뿐일 때 준세기씨와 간단한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 분은 나와 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이며 맞춤법이 갖춰진 장문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같이 글을 쓰자는 요청에 그분은 재미있을 것 같다는 답을 해 주었고 그 이후 한 번 더 미팅을 갖게 되었다. 야호!
1초 만에 생성된 '교차하는 영화만감'
글쓰기에 관해 두 번이나 만났지만 정작 중요한 사항은 모두 이메일 교환을 통해 이루어졌다. '교차하는 영화만감'이란 제목도 폴더생성 당시 1초 만에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을 갖다 붙였다. 매번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시며 신변잡기만 늘어놓다 헤어졌기 때문이다. 분량은 A4 2~3장, 일주일에 한 번 씩 번갈아가며 글을 쓸 것, 조금이라도 영화 관련 이야기가 들어갈 것. 틀은 시간이 지날수록 둘만의 스타일에 맞춰 나가겠지만 굳이 주제를 영화로 잡은 이유는 영화라는 매체가 접하기 쉽고 어디로든 가지를 뻗어나갈 소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영화와 경제', '영화와 심리', '영화와 미술' 등 다양한 대학 교양 강좌 명처럼 마음만 먹으면 어떤 주제와 소재도 영화에서 뽑아낼 수 있다. 외려 영화가 닿지 않는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드라마, 책읽기와 달리 영화는 두 시간 가량만 투자하면 되는 장점도 있다.
또 하나의 새로운 문을 열며
자폐아가 축산학 박사로 자란 실화를 다룬 영화 <템플 그랜딘>의 주인공 템플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헤쳐 나갈 때마다 문(門)을 통과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헬렌 켈러의 설리번 선생 같은 역할을 해주었던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템플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 "대학은 문 같은 거야. 널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문. 넌 그냥 그 문을 통과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되는 거야." 새로운 문을 열기 전까지 문 뒤의 상황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입사 면접 시 문 뒤에 어떤 면접관들이 앉아 있을 지, 남자 친구 집 방문을 열면 어떤 가구와 소품이 있을 지, 첫 발령받은 곳 문 뒤엔 어떤 구조의 사무실이 존재할지. 궁금하면 그 문을 열면 된다. 아주 어릴 적엔 겁이 없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어떤 문이든 발칵 열어 젖혔다. 나이를 먹을수록 신중을 기한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이 문이 나에게 맞는 것인가, 어렵지는 않을까 이것저것 따지고 문손잡이를 닳도록 잡았다 놓았다 반복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열지 못한 문은 너무 많았고 익숙하고 비슷한 문만 열며 정체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전에 모 잡지사의 드라마 리뷰 일거리가 들어왔을 때 덥석 문을 열고 글을 썼다. 몇 년 전 나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나 따위가 어디 감히, 글 솜씨가 수줍고 부끄러워서라는 핑계로 골방에 숨어 혼자만의 글을 끼적이다 삶을 마감했을 지도 모른다. 그 땐 긴장감에 바짝 힘이 들어간 글을 썼지만 이젠 조금 어깨를 내려놓은 글을 쓸까 한다. 가볍고 부담 없지만 정성을 들인 글말이다. 지금 이 포스팅이 내겐 또 하나의 문을 열고 새 세상에 한 걸음 내딛은 것과 같다.
준세기씨와 나는 직업과 세계관을 공유하지도 않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다. 굳이 공통점을 따지자면 술자리 대화에서 말이 잘 통하는 것 외에, 언젠가 이성과 결혼을 해서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미래관 정도? 같은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경우도 생기겠지만 영화관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나는 일상과 디테일한 감정에 중점을 두고 영화를 본다. 또 영화판에 관심이 많은 만큼 영화 내적인 요소가 자주 언급될 것 같다. 내 예상에 준세기씨는 경제와 정치에 집중된 이야기를 쓰지 않을까 싶다. 그 쪽에 관심도 많고 지식도 풍부하시다. 무엇보다 진중하신 분이라 한없이 경중한 내 글을 격주로 적절히 눌러 균형된 무게감을 이끌어갈 것이다. 다음주 풍성한 추석과 더불어 준세기씨의 멋진 글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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