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더니, 영화를 보고 나설 때는 햇빛이 쨍 하고 났다. '반대인가…' 영화를 보기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 조금 걱정 했더랬다. 왜냐하면 예전에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한동안 불편한 마음에 짜증이 좀 났었기 때문이다. 블랙스완도 잔인한 장면들이 있어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불편함의 지점은 아픈 장면 보다는 그 고통의 맥락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예전에 통섭 포럼에서 어떤 학생이 용감하게 "교수님 진리란 있는 것입니까?" 하고 팍!찔렀다. 잠시 눈을 껌뻑 거리던 교수가 대답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 하지...나무에 옹이가 있는데, 그 옹이가 어느 날 빠져 버렸어. 자....이 나무를 봤을 때 옹이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위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해본다. "주체란 무엇일까, 있는 것일까" "당신은 누구 입니까?"이 물음들에 대해서 우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까. 내 이름은 무엇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성격은 어떻고....이런 대답을 늘어놓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 이름이, 직업이, 성격이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까. 아니겠지. 그 빠져 버린 옹이처럼 주체란 내용이 없는 것이겠다. 현상에 대해서 이름으로, 직업으로, 성격으로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 무엇이 내 앞에 서 있느냐에 따라 그것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단순한(?) 반사판 같은 그런 것이 주체 아닐 까.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을 자기 앞에 두고 그 비춰진 모습을 보고 살아온 사람에게 기괴하고 낯섦이라는 것은, 그 기괴함과 낯섦이 마치 반사판을 왜곡 시키고 파괴할 것이라는 공포가 나타난다. 하지만 거울 앞에 있는 물체가 거울을 왜곡 시키는 경우가 있는 가. 기괴함으로 혹은 불편함으로 보여지는 것은 거울의 문제 일 것 이다.

나를 발견해 가는 과정은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일 까. 자신을 버림으로(lose yourself), 자신이 된다(be yourself). 하나의 대상을 오랜 시간 동안 비추다 보면 대상과 나를 착각 하게 된다. 마치 주체란 것이 내용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주체란 비어버린 옹이 같은 것이라서 내용이 없는 것이다. 비워내야 그 공간 사이로 다양한 내용들이 드나든다.
데카르트가 존재인식을 이끌어내기 위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라고 했다. 앞 문장 "나는 생각 한다"는 "나는 ~~라고 생각 한다"의 축약형인데, 내용은 없는 일종의 형식이다. 이 형식이 중요한데, "그게 무슨 존재인식의 증명이냐?"라는 물음에도 "나는 그게 무슨 존재인식의 증명이냐 라고 생각 한다"라는 형태로 끝없이 뒤로 물러나면서 스스로를 증명한다.
아무리 '~~~'을 많이 써 보아도 내용으로서의 나는 없다. 결국 "나는 나라고 생각 한다"라는 것만 남는다. 그 옹이 속에 무엇이 들어있던 간에 나라는 것은 옹이가 생겨 먹은 대로, 그 경계에 따라 파악이 될 뿐이다. 자신이 된다는 것은, 그 경계를 알게 된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눈먼 사람이 자신이 서 있는 무대의 모양을 파악하려고 할 때, 여기 저기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무대에서 떨어져 다칠 수 도 있겠지만, 그 두려움으로 몇 발자국만 왔다 갔다 한다면, 무대의 경계(모양)를 알기 어렵다. 그 무대에서 자유롭게 춤추기 위해선(자유롭진 않더라도 최소한 더 나은 퍼포먼스를 위하여) 떨어지고, 쓸리면서 무대의 경계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겠다.
#1. 니나는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신을 찾았을까.....대충 편하게 살면 안되나....대충 편하게 살아도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낀다면, 구지 떨어질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무대를 뛰어다니며 춤을 추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심어놓았는지, 만들어 놓았는지 알 수 없지만....마음 속에 저주의 낙인처럼 완성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심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낙인은 지울 수 도 없고 긁어서 피가 나는 니나 등의 상처처럼, 쓰라림으로 항상 자신을 환기 시킨다. 자신의 능력 따윈 안중에도 없다. 뛸 수 없어도 뛰게 만들고,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르게 만든다. 생각해보니 저주가 아니라, 어쩌면 굉장한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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